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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을 지우며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을 지운다
얼굴에 크림을 바른다
손가락으로 넓게 펴 바르고
화장지로 닦아낸다
눈썹이 지워지고 입술이 지워지고
아무런 색도 없는 얼굴 하나 나타난다
거친 피부 잡티 많은 낯선 얼굴
또 다른 내가 있다
처음 맑은 얼굴 점 하나 없었는데
어느새 이것저것 바르고 그려
회칠한 무덤처럼
이제는 원래 내 얼굴이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
지우고 싶다
헛된 욕망 위에 칠한 뻔뻔함
말미잘처럼 예민한 신경 줄을 덮어 놓은
위선의 화장을 지우고 싶다
끝없는 욕심 바꿀 수 없는 변명으로
덧입은 이브의 나뭇잎 옷 같은
가식의 그림을 지우고 싶다
지운 얼굴에 다시 화장을 해야 한다면
얼굴이 아닌 가슴에 하고 싶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굳은 마음에
화사한 사랑의 화장을 하자
손바닥 뒤집듯 쉬운 변절로 속앓이 하는
헤진 가슴에 믿음의 화장을 하자
온통 상처의 대못에도 잃지 않는 감사로
화장을 가슴에 하고 싶다
형도 색도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얼굴
처음처럼
화장 없이 두려움 없이
아무것도 덧칠하지 않은 투명한 얼굴로
태양 아래 나서고 싶다
김호순 시 l 그리움은 멈춤이 없습니다
l 내 안에 땅끝이 있다
화장을 지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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