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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깎으며
잠든 아버지를 지키는 밤나무 몇 그루
살아생전 받지 못한 효
차가운 땅에 누우신 채로
밤나무 향기에 쓸쓸한 마음을 달래신다
그리움이 익어 툭탁 떨어지는 알밤
평소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계명인 양
도토리만 한 것까지도 귀하다
깊어가는 밤
밤을 깎는다
무디어진 칼날을 던지고
톱날처럼 날카로운 밤나무 가위로
고집처럼 굳어있는
반달머리를 밀어내고 솜털 보송한
잔머리마저 벗겨 내면
희고 뽀얀 속살을 수줍은 듯 보인다.
겉보기엔 둥글고 커 보여도
속엔 포동포동 밤벌레가 집을 짓고
빛 좋은 개살구 마냥
실속 없는 내 인생이 보인다
겉보기엔 쭈글쭈글 볼품없는 한숨뿐이어도
그럴수록 속살은 더 달콤하고 연하고
구차한 듯 정갈한
아버지 인생이 보인다
아버지가 밤나무 밑을 그토록
오르내린 것은
가시 많은 밤투성이처럼
삶의 길목 길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인생의 가시를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밤 껍질처럼 굳어진 삶의 체면과 무능을
벗고 싶었으리라
가시 많은 인생의 숲이 지나가면
속살 눈부신 알밤처럼
새로운 삶의 절정을 느껴보고 싶으셨던 걸까
얼마나 깎고 깎으면
아픔 많은 인생의 가시들을 벗겨 낼 수 있을까
얼마나 벗겨 내면
비늘처럼 덮여있는 위선을 버릴 수 있을까
얼마나 버리고 버리면
알밤처럼 순연의 모습 드러낼 수 있을까
오늘따라 깊어지는 아버지의 그리움에
밤을 깎으며
독선과 모순 편견이 많은
내 인생을 다듬고 있다
김호순 시 l 그리움은 멈춤이 없습니다
l 아버지
밤을 깎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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