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3)
5. 일제강점기의 무궁화 말살 정책과 남궁억 선생
일제강점기에는 무궁화가 한국 민족의 상징적인 꽃이라는 이유로 전국적으로 뽑아 불태워 없애버림으로써 큰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된 사건, 즉 ‘한일합방’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자, 일제는 무궁화 말살 정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무궁화를 눈병 나는 꽃이라 비방하여 학생들이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게 하였고, 일제는 무궁화를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위험한 꽃으로 보고 모든 무궁화나무를 뽑고 베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사전’에 보면 무궁화를 다음과 같이 위험시 하고 있습니다.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인 꽃이며 2천 년 전의 문헌에 나오는 꽃이다. 고려시대에는 온 국민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는데 일본의 벚꽃, 영국의 장미와 같이 국화(國花)가 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이화(梨花)가 왕실화가 되면서 세력을 잃고 조선 민중으로부터 소원해졌다. 20세기의 신문명이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조선의 유지들은 민족사상의 통일과 국민정신의 진작을 위하여 글과 말로 모든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나 무궁화만은 여름에서 가을까지 3개월 내지 4개월이나 연속으로 필뿐 아니라 그 고결함은 위인의 풍모라 찬미하고 있다. 따라서 ‘무궁화 강산’ 운운하는 것은 조선의 별칭이며 불온한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근화 ㆍ 무궁화 ㆍ 근역 등은 모두 불온한 문구로 쓰이니 조심하여야 한다.”
그들은 무궁화를 이처럼 위험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궁화를 경멸하여 함부로 심지 못하게 하고 캐내어 없애라고까지 명령하였으며, 그 자리에 그들의 상징인 벚꽃나무를 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우리는 무궁화를 더욱 사랑 했습니다. 동아일보가 창간호 제호 도안을 무궁화로 장식하였는가 하면, 중앙학교의 모표도 ‘중’(中)‘중’(中) 자를 무궁화 화환으로 둘렀고, 오산학교와 대구사범학교에서는 무궁화동산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궁억(南宮檍)’ 선생의 무궁화 사건인데, 1918년 남궁억(1863~1939) 선생은 그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모곡학교를 세우고 몰래 무궁화 묘목을 가꾸었습니다. 그는 해마다 수십만 그루의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지방의 여러 학교와 교회에 팔거나 기증했습니다.
1931년에는 ‘무궁화동산’이란 노래를 지어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
빛나리라 삼천리 무궁화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남궁억(南宮檍) 선생은 무궁화 묘목을 전국적으로 보급해 오다가1933년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결국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일제는 그가 애지중지하던 7만 그루의 무궁화 묘목을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출처 및 참고도서]
예루살렘, 2015. 9. 1 발행
p164~p169,(겨레의 꽃 무궁화)
6. 일제강점기의 무궁화 말살 정책과 우호익 선생
일제의 무차별적인 무궁화 말살 정책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무궁화를 학문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 사람이 ‘우호익(禹浩翊)’ 선생입니다.
◯ 무궁화고(無窮花考) : 우호익 선생이 1927년 조선사상통신사 간행의 ‘조선 급 조선민족’에 실었던 ‘무궁화고(無窮花考)’는 당시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교수로 재직하던 우호익의 진솔(眞率)한 학술적 연구의 소산(所産)인 무궁화 관련 최초의 논문으로 세상의 많은 꽃 가운데서 무궁화가 어찌하여 우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민중의 이상화(理想花)로 추대(推戴)되었는지에 관하여 여러 문헌에 산재(散載)해 있는 글을 종합하여 무궁화의 사적가치(史的價値)를 고찰하였고 조선의 국화(國花)로 숭배하게 된 유래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무궁화에 대한 최초의 논문이란 점을 차치(且置) 하고라도 무궁화 연구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습니다.
‘무궁화고(無窮花考)’는 무궁화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무궁화의 이칭(異稱)’
‘문학상(文學上)의 무궁화’
‘의학상(醫學上)의 무궁화’
‘식물학상(植物學上)의 무궁화’
‘국화상(國花上)의 무궁화’로 세분화 하여서 연구하고 논증한 것입니다.
▷ 무궁화의 이칭(無窮花의 異稱) :
- 여러 문헌 속에 나타난 무궁화의 여러 가지 명칭에 관하여 논증하고 있습니다.
무궁화란 꽃의 속성에 따라 혹은 지방의 말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불려지게 된 것도 있다는 뚜렷한 문헌적 사료(史料)를(史料) 통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 문학상(文學上)의 무궁화 :
- 문헌에 기록된 내용들을 들어 무궁화가 얼마나 문학상에 귀중한 지위(地位)를 점령(占領)하였으며, 고결(高潔)한 가치(價値)를 발휘(發揮)하고 있는지를 예증(例證)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 예로부터 시인(時人)·묵객(墨客)들이 시(詩)를 지어 영탄(詠嘆)하며 노래를 불러 찬미(讚美)하였던 무궁화가 과연 얼마나 재자가인(才子佳人)의 가슴을 태웠으며, 문인(文人)들의 사랑을 받았는지는 문학상에 표현된 기록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지(感知)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 의학상(醫學上)의 무궁화 :
- 무궁화가 꽃, 열매, 껍질의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든 것을 약제(藥劑)로 쓰고 있음을 문헌적 고증을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무궁화는 사람 몸에 대하여 내과·외과를 총망라하여 각종 질병에 유효한 것으로 소위 만병통치(萬病通治)의 영약(靈藥) 임을(靈藥) 설명합니다.
▷ 식물학상(植物學上)의 무궁화 : 무궁화 학명(學名) 및 원산지, 무궁화의 생태적 특성, 무궁화의 용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 국화상(國花上)의 무궁화 :
- 산해경(山海經)과 고금기(故今記)에 기록된 군자국(君子國)이 과연 조선(朝鮮)을 지칭(指稱)하는 것인가를 논증하고 있으며, 무궁화와 우리 민족과의 오랜 관계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선 급 조선민족’에 일본어로 수록되었던 무궁화고(無窮花考)는 1927년 동광(東光)지 제13호에 無窮花考(上), 제15호에 無窮花考(中), 제16호에 無窮花考(中의 下)가 연재 되었고, 無窮花考(下)는 1927년 8월 동광(東光)지가 휴간됨으로써 끝을 보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928년 청년(靑年)지 제6호, 제7호에 무궁화 예찬(無窮花 禮讚)이란 제목으로 無窮花考(下)편의 내용이 연재되면서無窮花考는 완결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무궁화고(無窮花考)의 전체 내용상의 풍부함과 다양하고 정확한 문헌적 고증은 논리 정연(論理整然)하게(論理整然) 전개되고 있어, 시대에 앞선 무궁화 연구자료로서 많은 무궁화 연구가들이 전재(轉載)하는 무궁화 필독서(必讀書)가 되었습니다.
나라와 말과 글과 이름 그리고 심지어 밥그릇까지 빼앗아 간 일제 강점기의 그 침울했던 시기, 일제의 가혹한 압제 밑에서도 나라꽃으로서의 무궁화 위상(位相)을 정립(定立)하고, 우리 민족에게 국화애(國花愛)를 심어주기 위해 혼신(渾身)을 다해 학문적으로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문헌고증을 통해 무궁화를 연구한 ‘우호익(禹浩翊)’의 충정어린 공로는 우리 문학상의 무궁화에 관한 한 가히 금자탑(金字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홈페이지 ‘무궁나라’에서)
[무궁화 사진, 무궁화 자료 찾아보기]
☞ 바로가기
'지혜의 부요함 > 아! 대한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달계 무궁화 : 사임당, 새한, 스노우 드리프트, 옥녀, 옥선, 잔다르크, 장문 (0) | 2024.10.18 |
---|---|
배달계 무궁화 : 눈보라, 대덕사백, 배달, 백기원수, 백난, 백설 (0) | 2024.10.17 |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4) (3) | 2024.10.15 |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2) (0) | 2024.10.15 |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1) (0) | 2024.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