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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부요함/세계는 지금

이란의 뿌리를 찾아서

by buyoham 2024.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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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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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고대 ‘엘람 왕조’(BC 약 2700~BC 539)의 역사는 성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체적으로, ‘엘람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에 노아의 아들인 셈의 아들 중 하나로 등장합니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창세기 10:22)

 

이란의 고대 엘람인과 성서에 나오는 엘람의 연관성은 학자와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을 보이기도 하지만, 인류가 대홍수 후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믿는 저(부요함)는 이란의 엘람과 셈의 아들 엘람이 동일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엘람의 후손 이란인아르박삿8대손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인은 셈을 할아버지로 두는 형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란의 고대 엘람 왕조를 둘러싼 성서적, 역사적 이야기를 탐구하고, 고대 전쟁에서의 엘람의 역할, 그 지역의 확장, 그리고 성경 예언의 전개에 있어서 엘람의 중요성을 탐구할 것입니다.

 

1. 셈의 아들 엘람과 엘람 왕조의 엘람

성경은 엘람을 셈의 맏아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창 10:22). 그가 장자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엘람의 후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부 사항의 부재는 엘람의 혈통이 초기에 핵심 셈 공동체와 거리를 두고 먼 땅에 정착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성서적 전통에 따르면 엘람의 후손들은 아라라트 산맥을 넘어 남동부 지역으로 이주하여 결국 이란 남서부의 고지대에 도달했다고 믿어집니다.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성경의 특정 구절보다는 성경적 참고 자료, 역사적 지리학, 고고학적 발견의 조합에 크게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적 참고 자료 : 성경은 엘람을 셈의 아들 중 하나로 언급하고 있으며(10:22), ‘엘람인은 이란 남서부 및 그 주변 지역과 지속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4:1-9에서는 엘람 왕’(그돌라오멜)을 언급하는데, 이는 그 지역에 강력한 엘람문명이 존재했음을 나타냅니다.

 

역사적 지리 : 성경에 나오는 엘람지역은 종종 수사(Susa) 지역과 주변 고지대를 포함하여 현재 이란 남서부에 위치한 고대 역사적 왕국인 엘람과 연결됩니다.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연결되어 있고 아라라트 산맥과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이주 경로가 이 산맥을 통과하여 이란 고원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 : 고대 도시 수사(Susa)와 기타 엘람유적지를 포함한 이란 남서부의 고고학적 발견은 엘람사람들이 적어도 기원전 27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확고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발견은 ‘엘람’인들이 역사 초기에 이 지역에 정착했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며, 이는 성경의 족보가 제시하는 기간과 일치합니다.

 

특히 수사(Susa_에스더서에서는 수산으로 알려짐)는 성서 에스더서에 두드러지게 등장합니다. 수사(Susa)는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왕 통치 기간 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으며, 에스더서에 나오는 사건들의 주요 배경이 되었습니다.

 

언어 및 문화적 연결 : 엘람에는 이웃 메소포타미아 문화와 구별되지만 주변 민족과의 상호 작용을 암시하는 언어 및 문화적 요소가 있습니다. 이는 이란의 고지대에서 발전한 독특한 문화 영역으로의 이주와 통합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합니다.

 

전통적인 해석 :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은 종종 창세기 10장의 국가 목록을 홍수 후 인류의 확산에 대한 광범위한 설명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엘람의 후손은 근동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역사적으로 그들과 관련된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경은 엘람자손의 상세한 계보나 구체적인 이름을 제공하지 않지만, 위에서 살펴본 결론은 엘람은 주로 현재 이란 남서부에 위치한 고대 문명인 엘람인의 조상임을 입증합니다.

 

엘람인들이 언급되는 성경의 구절들은 종종 다른 나라들과 관련되거나 역사적 또는 예언적 맥락에서 언급됩니다(: 창세기 14:1, 이사야서 11:11, 예레미야서 49:34-39). 이러한 참고 문헌은 엘람의 후손인 특정 개인보다는 엘람의 국가나 지역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게 되며,, 따라서 성서에는 그의 후손 개인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엘람엘람 민족의 창시자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2. 엘람 왕조, 고대 이란에 정착

‘엘람’인들은 이란 남서부 지역, 특히 후제스탄 평원과 자그로스 산맥과 같은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고지대를 의미하는 엘람의 이름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광물과 목재 등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유명한 이 지역은 초기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전략적 위치 덕분에 ‘엘람’인들은 번성하고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이웃 문명과 광범위한 상호 작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고고학적 증거

수사와 안샨과 같은 유적지 : 수사(슈샨)와 안샨과 같은 후제스탄 평원의 주요 고고학 유적지는 엘람문명의 실질적인 증거를 제공합니다. 특히 수사(Susa)엘람의 주요 정치, 문화 중심지였으며 기원전 3~4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이 유적지의 발굴 작업을 통해 이 지역에 고도로 발전된 사회가 존재했음을 확인하는 엘람 문명의 유물, 비문 및 건축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자그로스 산맥 정착지 : 자그로스 산맥의 정착지와 요새에 대한 증거는 엘람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는 생각을 더욱 뒷받침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고지대 지역에서 엘람인문화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는 그들이 산과 주변 평야의 자원을 이용했음을 나타냅니다.

 

◯ 천연 자원

광물 및 목재 : 엘람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란 남서부의 산에는 금속 가공에 필수적인 구리, 주석, 납과 같은 광물이 풍부합니다. ‘엘람인들은 이러한 자원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여 경제력과 인근 지역과의 무역 능력에 기여했습니다. 자그로스 산맥의 목재는 건설과 무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적 무역로 : 엘람은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고원 및 그 너머를 연결하는 주요 무역로 근처에 위치하여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엘람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 접근할 수 있어 메소포타미아와의 무역이 용이했고, 페르시아 만 가장자리에 위치해 먼 문화권과의 해상 무역도 가능했습니다.

 

언어 및 역사적 기록

엘람의 의미 : 엘람이라는 용어 자체는 고지대또는 고지대를 의미하는 수메르어 ‘Elamtu’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언어학적 증거는 자그로스 산맥의 고지대와 주변 평야에 위치한 엘람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에 대한 지리적 설명과 일치합니다.

 

설형 문자 비문 : 메소포타미아 자료의 역사적 기록에는 군사 캠페인, 무역, 정치적 동맹의 맥락에서 엘람어가 자주 언급됩니다. 수메르, 아카드, 바빌로니아 문헌의 설형 문자 비문에서는 엘람을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웃 지역으로 자주 언급합니다.

 

메소포타미아와의 상호작용

문화적, 정치적 교류 : 수메르, 아카드, 바빌론과 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적 문헌에서는 전쟁부터 동맹, 무역에 이르기까지 엘람인들과의 상호 작용이 자주 언급됩니다. 이 기록은 엘람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메소포타미아 이웃 국가들과 지속적인 문화, 경제적 교류를 펼쳤음을 강조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영향 : 엘람과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영향은 종교 관습, 예술, 건축과 같은 공유된 문화 요소에서 볼 수 있듯이 상호적이었습니다. ‘엘람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측면을 채택하는 동시에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는 독특한 혁신에 기여했습니다.

 

요약

고고학적 발견, 언어학적 증거, 역사적 기록, 이 지역의 지리적 이점이 모두 결합되어 엘람인들이 이란 남서부에 정착하여 풍부한 천연자원을 활용하여 상업 및 무역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는 진술을 뒷받침합니다. 그들의 전략적 위치 덕분에 그들은 다른 문명,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광범위하게 상호 작용하여 고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3. 엘람 왕 그돌라오멜

‘그돌라오멜 왕은 창세기 14장에 언급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엘람의 왕이었으며 종종 역사상 최초의 기록된 전쟁으로 간주되는 전쟁에서 왕들의 연합을 이끌었습니다. 이 연합에는 다른 세 왕, 즉 시날 왕 아므라벨’, 엘라살 왕 아리옥’, 고임 왕 디달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들은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의 통치 하에 있다가 반역한 가나안 왕 다섯 명과 함께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돌라오멜(Chedorlaomer)’이라는 이름 자체는 쿠두르(Kudur)’라는 엘람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쿠두르(servant)’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신에 대한 그의 충성이나 헌신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그가 하나님의 종또는 다른 엘람 신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포함한 반역적인 도시들에 대한 ‘그돌라오멜’의 군사 작전은 그 기간 동안 엘람 왕국의 힘과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갈등은 싯딤 골짜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절정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그돌라오멜’과 그의 동맹자들은 처음에 가나안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전쟁 중에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기습 공격을 주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의 군대에 대한 '아브라함'의 승리는 그의 전략적 능력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사건의 진로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돌라오멜’의 역할은 고대 근동 지역에 대한 엘람 왕조의 영향력과 당시의 다른 세력과의 상호 작용을 강조합니다.

 

연합을 조직하고 중요한 군사 작전을 이끄는 데 있어서 그의 리더십은 엘람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4. 엘람과 이스라엘의 상호작용과 페르시아의 확장

‘그돌라오멜’ 시대 이후 엘람사람들은 마다이(야벳의 아들)의 후손인 메대사람들과 합병하여 영향력을 확대하여 강력한 페르시아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수사(Susa)에 수도를 세웠는데, 이 수사는 나중에 성서에 나오는 모르드개와 에스더 이야기에서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엘람’인들은 고대 근동의 지정학적 지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되었을 때, 일부는 엘람으로 흩어졌는데, 이는 이 고대 국가들 사이의 깊은 관계를 강조합니다.

 

유배 기간 동안 이스라엘사람들과 엘람사람들 사이의 연관성을 뒷받침하는 성서 구절을 예레미야 49:34-39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사람들이 엘람에서 피난처를 찾았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기간 동안 그 지역의 더 넓은 맥락에서 엘람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시드기야가 유다 왕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에, ‘엘람’을 두고 주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엘람’의 주력 무기인 활을 꺾어 버리겠다. 하늘의 네 끝에서 나온 사방의 바람을 ‘엘람’으로 몰아다가, 그들을 사방으로 흩어 버리겠다. 그러면 ‘엘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여러 나라로 유배되어 갈 것이다. 나는 ‘엘람’ 사람들을, 그들의 원수들, 곧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하겠다. 내가 이렇게 타오르는 분노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군대를 보내어서 그들을 뒤쫓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엘람’ 왕과 고관들을 그 땅에서 멸절시키고, ‘엘람’에 나의 보좌를 놓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훗날에는 내가 사로잡혀 간 ‘엘람’의 포로를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49:34-36_새번역)

 

이 구절은 엘람이스라엘바벨론포로 기간 동안 중요한 존재였음을 암시하며, 그 지역 전체에 걸쳐(잠재적으로 이스라엘인을 포함하여) 사람들의 이동을 강조합니다.

 

또한 바빌론 유배 기간 동안 이스라엘사람들이 특히 엘람으로 흩어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직접적인 고고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 그룹 사이의 상호 작용을 시사하는 역사적, 정황적 증거가 있으며, ‘일부 이스라엘인이 포로 기간 동안이나 그 후에 엘람에 정착했음을 짐작할만한 근거들은 존재합니다.

 

기원전 586년에 시작된 바빌론유배로 인해 많은 이스라엘사람들이 고국에서 바빌론신바빌로니아제국 내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란남서부에 위치한 엘람은 이 제국의 일부였으며 지리적으로 바빌로니아중심부와 가깝습니다. 이러한 근접성으로 인해 난민이 된 이스라엘사람들 중 일부가 엘람의 지역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이, 신약 성경의 오순절 동안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들의 목록에서 메대인엘람인메소포타미아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2:9). 이러한 언급에서 이스라엘사람들이 바빌론유배 기간 동안 이 지역에 정착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5. 엘람에 대한 예언

성경은 ‘엘람’인들을 숙련된 궁수와 전사로 언급하며(이사야 22:6, 예레미야 25:25), 종종 사납고 완강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에스겔이나 예레미야 같은 예언서는 그들을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나라이자 궁극적으로 자비와 회복을 받을 백성으로 묘사합니다(예레미야 49:34-39).

 

그러나 엘람의 미래 회복에 대한 예언적 약속은 한때 이스라엘의 적으로 여겨졌던 민족에게 희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나는 엘람 왕과 고관들을 그 땅에서 멸절시키고, 엘람에 나의 보좌를 놓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훗날에는 내가 사로잡혀 간 엘람의 포로를 돌아오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49:38-39)

 

6. 페르시아와 키루스(고레스) 대왕

키루스대왕과 메디아의 관계는 그의 권력 상승과 페르시아제국 형성의 핵심 부분이며, 일련의 사건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메디아 제국의 전복(기원전 550년경)

키루스(고레스)’는 처음에 아스티아게스의 통치를 받는 메디아제국의 지배를 받는 속국인 안샨의 통치자로서 권력을 잡았습니다. ‘키루스메디아와 연합하는 대신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를 물리치고 메디아제국을 전복시켰습니다.

 

이 승리는 아케메네스(초기의 페르시아)’ 제국의 시작을 의미하며 키루스메디아를 자신의 확장 영역으로 흡수했습니다.

 

키루스메디아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거나 정복하는 대신 그들을 자신의 제국에 통합하여 메디아인들을 자신의 행정 내에서 파트너이자 동맹자로 대했습니다. 많은 메디아사람들은 새로운 페르시아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지역을 안정시키고 두 민족 사이에 통일감을 조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빌론의 확장과 정복(기원전 539)

메디아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제국의 기초를 다진 후 키루스는 이 지역의 다른 강력한 왕국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그가 바빌론을 정복한 것은 중요한 업적이었으며 종종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승리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메디아가 패배한 후, ‘메디아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핵심 부분이 되어있었습니다. ‘메디아인들은 정복당한 신민으로 취급되지 않고 새로운 행정 구조 내에서 동등하게 통합되었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메디아페르시아가 권력을 공유하고 함께 통치함으로써 제국을 통일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주요 역할에 메디아인이 포함된 것은 키루스의 통치의 특징이었던 정복된 민족의 전통과 지도자를 존중하고 통합하려는 그의 정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키루스 대왕에 대한 이란인들의 인식

키루스대왕은 고대와 오늘날 모두 이란인들의 마음속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종종 정의, 지혜, 비전 있는 리더십의 상징으로 간주됩니다. 많은 이란인들은 그를 군사적 정복자일 뿐만 아니라 인권의 옹호자이자 다양한 문화의 통합자로 여깁니다.

 

다양한 전통에 대한 관용과 존중의 정책은 그를 당시의 다른 통치자들과 차별화시켰으며 현대 기준에서도 진보적인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현대 이란에서 키루스는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산은 그가 바빌론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는 1029고레스 대왕의 날을 매년 기념하는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영예를 얻고 있습니다.

 

파사르가다에(Pasargadae)’에 위치한 키루스의 무덤은 이 상징적인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오는 이란인과 전 세계 사람들의 순례지로 남아 있습니다. ‘키루스의 유산은 페르시아문화와 문명의 황금기를 상징하며 이란의 정체성과 자부심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키루스의 영향

키루스(Cyrus)’는 정복된 민족의 전통과, 지도자를 존중하는 효율적인 통치로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과 문화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제국의 권위아래 다양한 지역이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중앙 집중식 통치 시스템을 확립하였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제국의 광대하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영토 내에서 반란과 불안정을 방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리우스 대왕크세르크세스 1와 같은 키루스의 후계자들은 로열 로드(Royal Road)’를 건설하고 지역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사트라피(Satrapy)를 확립하는 등 제국의 행정 및 기반 시설 측면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다양한 문화를 통합하고 무역을 육성하며 이 지역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 나갔습니다.

 

로얄 로드 : ‘로얄 로드는 기원전 5세기경 아케메네스 제국시대에 페르시아다리우스 대왕이 건설한 고대 고속도로였습니다. 그것은 현대 이란의 수사에서 현대 터키의 사르디스까지 약 2,700킬로미터(1,700마일)에 걸쳐 뻗어 있었습니다.

 

이 도로는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신속한 통신, 무역, 군대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메신저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중계소를 이용해 행정 효율성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사트라피(속주) : 사트라피는 아케메네스 제국내의 지방으로, 총독과 유사한 사트라프가 통치했습니다. ‘다리우스 대왕은 광대한 영토에 대한 더 나은 통제와 효율적인 관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국을 이러한 행정 구역으로 조직했습니다. 각 총독은 세금 징수, 법과 질서 유지, 지방 방어를 담당했습니다. 총독은 상당한 지역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여전히 페르시아 왕의 중앙 권위에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이 시스템을 통해 제국은 다양한 인구와 광대한 토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나가기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이란의 고대 엘람 왕조와 셈의 아들 엘람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했습니다.

고레스 대왕을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나라였던 이란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희망하며, 오늘날 우리가 평화와 화해를 추구할 때, 과거에 적으로 여겨졌던 국가라도 하나님의 인도 아래 은혜와 치유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저는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이 평화를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억지로라도 찾고 싶어서, 긴 시간 동안 검색하고 공부하며 이 글을 작성했습니다.

 

비록 글이 다소 두서없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향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024. 10. 08. 부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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