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9. 2. 18:23ㆍ세계는 지금/오디세이
[오디세이 제8편] 오디세우스와 성경

― 서로 다른 이야기에서 만나는 하나의 질문
이제 우리가 처음 품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인 《오디세이》를 읽으면서 성경이 떠오르는 것일까?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오디세이》는 그리스 신화와 서사시의 전통에서 나온 이야기다.
성경과 직접 연결된 작품도 아니고,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성경의 비유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인간의 질문은 있다.
1. 떠남
오디세우스는 집을 떠난다.
전쟁 때문이다.
성경에도 수많은 떠남이 있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땅을 떠나 부르심을 따라간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난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떠남’은 인간의 삶에서 반복되는 사건이다.
2. 유혹
오디세우스에게는 세이렌과 칼립소가 있었다.
성경에도 유혹과 시험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혹의 이름이 아니다.
유혹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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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체성을 잃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낯선 사람처럼 살아간다.
탕자는 먼 나라에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다.
현대인 역시 때로는 성공과 돈과 사회적 역할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는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4. 정신을 차리다
오디세우스는 다시 이타카를 향한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다.
성경은 그것을 ‘스스로 돌이킴’이라고 표현한다.
삶이 방향을 잃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인지도 모른다.

5. 돌아가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온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도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이야기를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나란히 놓아 볼 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6. 그리고 여기에서 놀런의 《오디세이》를 다시 보게 된다
2026년의 영화는 단순히 고대의 모험담을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 아니다.
놀런의 영화는 오디세우스를 죄책감과 책임을 짊어진 인간으로 더 강하게 바라본다.
AP의 영화 리뷰도 놀런의 각색이 시간·기억·정체성이라는 그의 기존 관심사와 함께 희생, 충실함, 개인적 성찰을 강조한다고 평가했다.
특히 영화에는 호메로스 원작보다 강한 죄책감과 속죄의 정서가 드러난다는 분석도 있다.
《애틀랜틱》은 놀런의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목마 사건을 자신의 죄책감과 연결하고, 고백과 회개의 이미지가 가톨릭적 문화 배경과도 연상된다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기독교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놀런이 가톨릭적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그것만으로 현재의 개인적 신앙을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잃어버린 길에서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
7. 그리고 2,800년 전의 이야기는 다시 서울로 온다
놀런은 2026년 8월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감독과 배우 맷 데이먼, 샤를리즈 테론 등이 서울을 찾았고, 8월 4일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한국 프리미어가 열렸다.
한국 개봉은 8월 5일이었다.
그리고 불과 19일 만에 한국 관객 7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오늘은 2026년 9월 2일.
한국에서 8월 5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28일째에도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누적 관객 912만 4,237명.
이미 900만 관객을 넘어섰고
천만 관객을 향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이것은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2,800년 전 이타카로 돌아가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2026년 서울의 극장에 도착한 것이다.
8. 호메로스에서 조이스, 그리고 놀런까지
이제 처음 질문도 다시 답할 수 있다.
오디세우스와 율리시즈는 같은 인물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영어 문화권에서 Ulysses(율리시즈)라는 이름으로 전해졌고,
제임스 조이스는 그 이름을 제목으로 삼아 20세기 더블린의 하루를 호메로스의 서사 구조와 연결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런은 다시 그 고대의 이야기를 거대한 영화로 만들었다.
고대의 목소리가 책으로 전해지고,
책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다시 영화가 되었다.
이야기를 담는 그릇은 계속 달라졌다.
하지만 질문은 달라지지 않았다.
9. 마지막 질문
오디세우스에게 본향은 이타카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본향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길을 잃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향해 돌아가야 하는가?
성경을 믿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한 걸음 더 깊어진다.
“나의 본향은 어디인가?”
어쩌면 이것이 2,800년 동안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살아남은 이유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돌아갈 곳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호메로스의 목소리에서 IMAX 스크린까지
2,800년 전에는 한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거대한 IMAX 스크린에서 본다.
놀런은 《오디세이》에서 IMAX를 단순한 대형 화면이 아니라 관객이 이야기 속에 들어가도록 하는 영화적 경험으로 활용했다.
실제로 영화 제작 과정은 대규모 실제 촬영과 IMAX 기술을 결합했고, 놀런은 영화관에서의 집단적 경험 자체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한국 방문 때 강조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도 좋겠다.
호메로스의 목소리에서 시작된 오디세우스의 여행이
오늘날 IMAX 스크린까지 도착했다.
그러나 스크린이 아무리 커져도,
이 이야기의 마지막 질문은 아주 작다.
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질문이다.
🔎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 그리고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오디세우스는 결국 이타카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 우리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2026.09.02. 부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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